딤창

한가람의 큰 뜻

최초에 고(故) 한가람 정영수 박사는 ‘진주’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었다. 그땐 그랬다. 1970년대 초의 경남지역에는 간호원(현, 간호사)이 절대 모자라 지역민들이 질 좋은 의료서비스를 기대할 수 없었다.

이제는 흘러간 옛 시절의 이야기. 그때만 해도 간호인력 배출구로 지역 내에 겨우 두 개 소의 기술 학교가 존재했다. 여기에서 배출되는 연간 70여 명의 졸업생만으로는 경남지역에서 필요로 하는 간호인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마저 간호원보 다 간호보조원 비중이 높았고 ‘국가 면허 간호원’ 이 지역 내 민간병원에 단 한 명도 없어, 지역 의료계가 인식하는 인력부족 문제가 날로 심화되고 있었다.

고향에 대해 사무치는 그리움과 애정으로 일관한 한 생애였다. 정영수 박사는 일본 유학과 국내외에서의 의과대학 생활, 군의관 복무 등으로 인해 16살 이후 스무 해 남짓 타향에서 지내다 서른다섯에야 아름다운 고향 진주로 돌아와 병원을 열었다. 뛰어난 의술이 빠르게 주변에 알려져 머지않아 병원은 성장일로(成長一路)에 들어섰으나, 당장의 성공에 도취돼 자신의 안위만 챙기는 좁은 삶을 추구하지 않았다. ‘큰 강’을 뜻하는 자신의 호처럼, 고향을 더 윤택하고 기름지게 가꾸는 넉넉한 품이 되기 위해 봉사의 뜻을 세우고 따랐다.

이것이 그가 병원에 이어 간호조무원학원을 연 이유였다.도리없이 무자격 간호원을 고용해 울며 겨자먹기식 운영을 이어가던 당시의 지역 의료계. 이 딱한 사정을 전해 온 진주의사회의 간곡한 청을 이기지 못해, 결국 ‘헌신’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학원 설립 당시에도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란 사실을 잘 알고있었다.이에 오래지않아 한가람은 전문 간호인력을 양성 하고 배출할 ‘학교’ 설립을 결심하게 되었다.

진주보건대학 50년 역사 첫 페이지에는 이처럼 지역의료, 나아가 국민 보건의 향상을 꿈꿨던 한가람 정영수 박사의 큰 뜻이 있었다.

경상남도 내 간호원 과부족 현황(1971년)

구분 병원 보건소
기관 수 290 26
간호원 소요인원(명) 1,450 130
현재원(명) 0 60
부족 수(명) 1,450 70
* 한가람학원 법인 신청서 및 인가서 참고

간호인력의 지나친 해외취업에다, 결혼 등으로 인한 전업으로 인해 사람을 찾지 못해 난리였던 시절이었습니다.
무자격 간호원 문제가 지역을 넘어 전국적 문제로 떠오르며 신문 지면에서 ‘무자격 간호원 주사에 환자 절명’같은 제목의 기사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던 때였죠.
그렇기 때문에 간호전문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하는 일은 지역의료의 향상에 더해 국민 보건 증진에 이바지할 수 있는 아주 뜻깊은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한번 결심이 서니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더군요.
결국 오래지 않아 안정적인 삶보다 모험의 길에 들어서기로 결심했습니다.

-고(故) 한가람 정영수 박사 어록 중에서

1971년 5월 8일

세상의 모든 처음은 ‘두렵다.’ 그렇기에 세상 사람들은 이 처음의 두려움을 당당히 극복해 낸 이들에게 존경을 표하고는한다. 뜻을 세운 이 후, 이를 현실로 옮기기 위한 한가람의 발걸음은 곁에서 보기에 숨 가쁠정도로 기민했다. 우선 대학설립을 위한 재단출범을 위해 ‘한가람학원’을 설립했다. 넘어야 할 첫 번째 산은 문교부(現 교육부)의 법인인가 였다. 짧은 기간 안에 여러 서류를 준비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정영수 박사와 초대 이사회 구성원들은 설립 취지서와 정관, 그리고 재산총괄표 등을 마련했다. 이 중 특히 중요한 문건은 학교 설립의 취지와 향후 운영 철학이 담긴 ‘설립취지서’ 였는데, 중요 대목을 추려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사단법인의 목적과 조직 구성, 업무 및 집행의 근본 규칙을 정리한 정관도 중요한 문건이었는데, 특히 제 6장을 들여다보면 학교 설립에 관한 정영수 박사의 진심을 엿볼 수 있다. 곧 모습을 드러낼 학교의 유지와 경영을 위한 수익사업으로 의료사업을 못박고, 이에 따라 기존‘정영수 병원’을 학교의 부속기관으로 명시 했던 것이다. 이는 ‘병원을위한학교’가 아니라, ‘학교를 위한 병원’에 대한 뜻을 명확히 드러낸 대목으로 공공의 이익을 위한 사업에 기꺼이 사재를 내놓겠다는 의지로도 해석할 수 있었다.

학교 설립을 위한 여정의 첫 고비를 무사히 돌파한건 1971년 5월 8일이었다. 이 역사적인날, 한가람학원은 비로소 문교부 인가를 취득했다. 이후 학원 임원들은 진주간호전문 학교 설립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해 같은 해 12월 23일에는 진주 간호전문학교 설립 신청에 대한 인가 역시 획득할 수 있었다.

우리 대학의 처음은 그 자체로 위대한 프런티어의 출발점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국가차원 간호인력 부족에 대응해 지역에 ‘백의의 단비’를 내릴 민간차원의 첫 시도중하나였다. 또 교육 기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지역 여성들에게 고등교육 기회를 제공했다는 측면에서도 진주지역 향토사(鄕土史)의 대표적 프런티어로 손꼽힐만했다.

진주보건대 최초의 정관 중 ‘제6장 수익사업’

제24조 (수익사업의 종류)
이 법인은 소속 학교를 유지 및 경영하기 위해 의료사업을 한다.

제25조 (수익사업의 명칭)
① 전조의 사업을 하기 위하여 서남간호전문학교* 부속 정영수 병원을 경영한다.
② 병원은 본 법인에서 직접 관리 운영한다.

* ‘서남간호전문학교'라는 명칭은 정관 작성 당시까지 사용했던 잠정적인 명칭으로, 이 교명은 결국 사용되지는 않았다. 우리 대학 최초의 명칭은 '진주간호전문학교'이다

경상남도 간호원 및 양호교사를 양성할 간호전문학교가 하나도 없어 도민의 보건관리, 특히 무의 농어촌 진료에 손이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를 절감하고 국가 보건정책을 도와 도민 보건 향상에 기여하고자,
사립 간호전문학교를 설립해 교육의 근본 이념에 입각한 운영으로 지도 간호원 및 양호교사를 양성 및 배출하고자 합니다.

- 한가람학원 설립취지서 중에서

학교의 모양 갖추기

설립 당시 진주보건대학교는 경남지역에 독립된 교사(校舍)를 가진 ‘유일’한 대학이었다. 경남지역뿐만 아니라 70년대 대부분의 간호전문학교는 병원에 딸린 부설 시설이었다. 사재를 털어 학교 설립의 뜻을 세운 만큼, 고(故) 정영수 박사에게 학교의 터는 중요했을 것이다.

1970년, 지리산 자락 아래 남강을 마주한 곳에 우리 대학의 터가 정해진다. 배산임수(背山臨水)에 꼭 맞는 위치 였다. 예로부터 배산임수한 터는 명당으로 손꼽혔다. 산을 등지고 물을 마주한 곳으로 실용적인 면도 존재했지만, 산의 기운이 물에 가로막혀 모이는 곳으로 풍수적으로 의미가 깊었다.

게다가 교가에서 알 수 있듯 우리 대학의 터엔 진주 사직단이 위치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훼손되어 현재는 흔적 조차 찾을 수 없지만, 진양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 비추어 보아 우리 대학의 위치에 자리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직단은 땅의 신(社)과 곡식의 신(稷)을 모시는 곳으로 국가의 가장 중요한 시설이었다.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 땅 과 곡식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런 성스러운 터를 배움터로 삼기를 바라는 고(故) 정영수박사의 염원이 깃든 곳에 우리 대학이 세워졌다. 정영수 박사는 이곳에서 장차 나라를 이끌 진주보건인들이 큰 뜻 을 품고 삶의 지혜와 재주를 터득하고, 학문과 인격도야(人格陶冶)에 매진하기를 바랐다. 나라와 백성을 위했던 곳에 ‘진주간호전문학교’라는 배움의 터가 세워지고, 당시로는 보기 힘든 최신식의 시설을 갖춘 공간에서 학생들은 온전히 학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우리 대학은 우수한 교육 시설만큼 훌륭한 교육환경으로 시작했다. 오랜기간 지역 의료계에 헌신했던 고(故) 정영수 박사였기에 그를 따르던 사람이 많았다. 그의 학교설립 소식을 듣고, 미래 보건 인력 양성 이라는 뜻에 동감했던 경남지역의 엘리트 의료 인력들이 자원해서 발 벗고 나섰다. 초창기 교수진은 고(故) 정영수 박사의 든든한 오른팔이 되어 학생뿐만 아니라 전진주보건인의 교육에 힘썼다. 그렇게 1972년 지금에 비하면 단출한 2층짜리 건물에서 우리나라 미래의 보건인력이 움트기 시작했다. 오늘의 진주 보건대학교는 이렇게 시작했다.

아침에 지리 영봉 우러러보며
저녁에 남강 노을 굽어보면서 내일의 역군들이 큰 뜻을 품고
슬기를 갈고 닦는 사단(社壇) 학대(學隊)다

- 진주보건대학교 교가 1절 중

경남지역 최초의
사립 간호전문학교 탄생

우리 대학이 태동할 무렵, 경남지역 병원에 국가시험을 치른 공인된 간호원 수는 ‘0명’이었다.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땐 그랬다. 정부 산하의 보건소만이 겨우 간호원을 둘 형편이었지만 이마저도 필요 인력의 반도 못 미치는 인원이었다.

1970년대는 산업화 흐름에 따라 직업 기술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고등기술학교들이 설립되던 시기였다. 고등기술학교는 정규학교에 다니지 않아도 입학할 수 있었고, 실질 교육이 중요했기에 교육 시설 없이도 공장 또는 사업장에 설치해 운영할 수 있었다. 대도시가 아닌 지방일수록 간호 인력은 부족했기에 경남지역도 간호 관련 고등기술학교는 보유하고 있었다. ‘진주간호고등기술학교’와 ‘마산간호고등기술학교’ 두 기술학교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간호고등기술학교를 졸업해서는 국가에서 주관하는 간호원 국가시험을 치를 수 없었다.

간호보조원과 간호원은 엄연히 다르다. 간호원은 국가시험을 치르고, 국가 공인의 자격증을 가져야 한다. 국가시험을 치르기 위해선 간호전문학교의 3년 과정을 수료하거나 4년제 대학의 간호학과를 졸업해야 했다. 그러나 경남지역엔 이러한 전문간호인력을 배출할 수 있는 학교가 없었다. 간호전문학교도 없던 경남지역에 간호원이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간호원 수급의 문제는 대도시의 형편도 다르지 않았다. 서울 시내의 병원조차 근무할 간호원이 부족해 간호원 수급에 큰 차질을 빚고 있었다. 1만6천여명의 간호원 중에 3천여명은 인력수출의 붐을 타고 해외로 나갔고, 7천여명은 결혼해 가사를 돌보게 되어 일할 수 없었다. 전국의 간호원 수는 6천여명 밖에 되지 않았다. 정부에서도 부족한 의료 인력 상황을 공감하며 고등교육 시설의 의학계 설립을 장려했다.

이런 의미에서 경남지역에 진주보건대학교가 세워진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깊었다. 우리 대학은 경남 지역 ‘최초’의 사립 간호전문학교였다. 최고(最高)라는 타이틀은 누구 든 가질 수 있지만, 최초(最初)는 다르다. 최초는 늘 역사가 된다. 과거에 없었던 것을 시작한다는 것 만으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선구자적인 면모로 세워진 경남지역 최초의 사립 간호전문학교인 우리 대학은 없어지지않는 역사로 길이 남을 것 이다.

1972년도 대학생 정원 조정원칙 중 인력수급계획상부족부문

① 공학계(기계공학과, 건축공학과, 토목공학과)
② 의학계(의학과, 치의학과, 간호학과)
③ 해양계(해양학과, 기관학과)
④ 사범계(중등교원)

有資格(유자격) 看護員(간호원) 모자라 「一線医療(일선의료)」 에 亦信號(역신호)

제1회 입학식 풍경

1972년 3월 20일. 봄이 왔다 하기엔 아직 쌀쌀한 날씨였다. 본관 건물은 여전히 공사가 진행 중인데다 전날 왔던 비로 인해 운동장은 온통 진흙탕인 형편. 일기(日氣)가 이러니 다소 어수선한 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을 대하는 열기만은 진지했다. 이제 막 ‘진주 간호전문학교’라는 간판을 내건 우리 대학의 채 완공되지 못한 본관 내부는, ‘제1회’ 입학식을 치르기 위해 모인 80여 명의 앳된 소녀들과 그 모습을 눈에 담기 위한 학부모들, 그리고 최초의 이사진과 교수진, 역사적인 학교의 첫 시작을 함께 하기 위한 지역 인사들로 북적였다. 신입생 소녀들의 가슴을 뛰게 한 건 이제 막 걸음마를 떼는 신생 학교가 갖춘 온전한 모습이었다. 기존 간호고등학교의 경우 병원 부속기관에 머물러 구석진 한 편의 협소하고 열악한 공간을 배정받기 일쑤였다. 때문에 운동장과 본관 건물까지 갖춘 번듯한 학교의 일원이 될 수 있단 사실은, 소녀들의 어린 마음을 부풀어 오르게 하기 충분했다.

최초의 모집 요강이 발표되자, 삽시간에 지역 여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이목을 잡아끌었다. 진주 지역 내 ‘여고’가 진주여고와 선명여고, 단 두 곳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학원법인 설립과 학교 건설사업에 집중하다 보니 요즘 이라면 그 흔한 학교 홍보에 조금의 힘도 나눠 쓸 수 없었다. 그런데도 최초의 모집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지역 내 두 여고에서만 40명이 넘는 인원이 진주간호전문학교에 지원을 해와, 제1회 입학생 정원 80명 중 절반에 이르는 숫자를 진주 출신 학생들로만 채울 수 있었다.

지역 여성들의 오랜 염원을 받아 안은 학교이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여전히 쉽지 않던 1970년대였다. 일자리가 많다는 서울에서도 여성들에게 할당된 일 자리는 단순 노무직에 가까워 식모와 하녀, 여공의 ‘서러운’ 사연들이 시중에 널리 퍼져 있던 시대였다. 또 고향에 남은 여성들에게는 요즘 기준으론 조혼(早婚)이 당연시 되던 때이기도 했다. 따라서 간호원은 여성이 전문성을 인정받으며 나름의 생활을 상상할 수 있는 흔치않은 일자리일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 과거처럼 간호조무원 자격만 갖추고 있는 간호고등기술학교의 한계를 넘어 졸업과 함께 국가시험응시자격을 얻을 수 있는 간호전문학교가 출범했던 것이다. 이에 우리 대학은 진주지역 여성들에게 새로운 꿈의 원천일 수 밖에 없었다. 지역 내 전문직 여성들을 배출할 수 있는 최초 교육기관의 탄생! 그렇게 진주간호전문학교는 진주 향토사(鄕土史)에 한 획을 그으며, 또 진주 여성사의 제 2막을 열며, 역사적인 첫 걸음을 디딜 수 있었다.

아버지,
여기가 제가 다닐 대학이에요

그때의 진주간호전문학교는
우리 진주지역 여성들의 오랜 염원을 받아 안은 교육기관이었습니다.
이제 막 고등학교 문턱을 넘게된 지방의 소녀들이
과거와 다른 인생계획을 가질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우리 대학은 지역 여성들의 또 다른 꿈이기도 했습니다.

- 제1회 입학생 김정자의 회고

사랑으로 키운
학생들

개교 당시 우리 대학은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했다. 모두 여학생들로 구성된 우리 대학의 학생들은 각자 가정 에서 귀하게 자란 고운 딸들이었다. 부모는 학교와 정영수 박사를 믿고 학생을 맡겼기에, 학생에 대한 책임감은 막중했다. 이는 교직원과 교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정영수 박사와 교직원들은 평일엔 밤낮으로 학생들의 학업 정진과 교육에 힘쓰고, 주말에는 학생들과 즐겁게 어울리곤 했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생들을 위해 손수 주말마다 음식을 해오기도 했다. 잡채나 불고기처럼 잔치 음식은 물론, 실제 제사나 가족 행사에도 학생들을 불러 음식을 나누었다. 게다가 정영수 박사는 직접 차를 몰며 학생들의 운전기사를 자청하기도 했다. 학생들이 병원 기숙사에서 학교로 오다 무슨 일이 날까 걱정된다는게 그 이유였다. 이렇게 그는 정말 학생들을 아버지의 마음으로 애지중지 키웠다.

그러나 이제 갓 성인이 된 천방지축 소녀들이었다. 실습실 소독기에 밤이나 고구마를 삶아 먹기도 하고, 저녁식사 시간에 몰래 우유감통에 나물과 밥을 담아와서 야식으로 비빔밥을 해먹기도 했다.불꺼진 기숙사 담을 넘어 야행(夜行)을 즐기다 걸려 혼나기도 했고, 기숙사 뒤 딸기밭의 딸기를 훔쳐먹다 걸리기도 했다. 훔쳐먹은 딸기값은 정영수 박사가 사비로 물어줬다. 이런 소녀들의 행동을 정영수 박사는 눈감아 주기도 하며 아버지처럼 품어줬다.

그러나 정영수 박사도 때로는 엄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그 일례가 경상대 ROTC 축제 날에 맞춰 소풍을 간 것이다. 똑똑하고 부잣집딸도 많았던 우리 대학 학생들은 주변 지역 남학생들에게 흠모의 대상이었다. 그중에도 경상대의 ROTC 학생들은 ROTC 축제에 같이 갈 파트너를 구하기위해 우리 대학에 방문하곤 했다. 이를 걱정하던 정영수 박사는 고심끝에 그날에 맞춰 학생들과 소풍을 떠난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도 소녀이고 여자였다. 이들이라고 연애에 대한 설렘이나 호기심이 없었을까. 하루는 소녀들도 정영수 박사에게 뿔이나 정문으로 들어오는 관광버스에 책가방을 던지며 시위했다. 그 소동으로 결국 소풍은 무산됐지만 정영수 박사는 혹시나 하는 걱정에 카메라를 들고 ROTC 축제에 갔다. 파트너로 축제에 간 사람은 퇴학이라는 엄포를 놓으며 말이다.

정영수 박사와 교직원들이 때로는 엄하게 학생들을 다그쳤지만, 그 바탕엔 애정이 있었다. 학생들도 반항심에 치기 어린 행동도 했지만, 정영수 박사와 교수진을 존경하는 마음은 변치 않았다. 이런 독특한 면학 분위기는 학생들과 교수, 교직원 사이를 더욱 특별하게 했고, 학생들이 애교심(愛校心)을 갖고 학업에 정진할 수 있도록 했다.

정영수 박사님은
아버지 같았습니다

최초라는 영광

시작은 늘 의미 있고 특별하지만, 그 의미가 퇴색되지 않으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의 우리 대학이 있기까지 1회 졸업생들의 공(功)이 컸다. 1회 졸업생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 학교에 입학했다. 원서 접수 시간을 맞추기 위해 밤에 배를 한 척 빌려 삼천포에서 진주까지 온 학생부터 간호학교에 다니고 싶어 3일 동안 집에서 시위 한 학생까지. 여성 교육이 척박하던 시절 저마다의 꿈을 가지고 우리 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1회 입학생이라는 자리는 그리 녹록지 않았다. 학교의 설립 인가가 늦어져 다른 학교보다 늦은 3월 20 일에 입학했다. 늦은 인가에 ‘가짜 학교’라는 소문이 나 학생들의 맘고생이 심했다. 수업에 지장은 없었지만, 학교 건물 바닥은 군데군데 마감이 안 되어 있었고 기숙사도 모든 학생을 수용하기엔 부족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전부 논이었던 학교 언덕길은 진흙투성이가 되었고, 1학년 때 생긴 도서관은 교실 한 개에 책 몇 권 있는 것이 다 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대학의 학생들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했다. 공부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배울 수 없던 때였다. 학생들은 간절했기에 비가 오는 날엔 장화를 신고 연탄재를 뿌리며 학교 언덕길을 올랐다. 부족 한 도서를 채우기 위해 손수 도서 기부를 요청하는 편지를 경남 일대의 의사들에게 보냈다.

이런 학생들의 마음을 알기에 고(故) 정영수 박사도 자신의 병원을 아낌없이 개방했다. 선배들이 없는 대신 우리 대학 학생들에겐 정영수 박사가 있었다. 병원에 특이한 수술이 있으면 병원 기숙사에 있는 학생들을 불러 직접 수술을 볼 수 있게 했다. 암 덩어리도 직접 만져보게 하고, 왜 암이라고 하는지 물어보고 학생들이 생각해보게 했다. 의사를 가르치듯 간호과 학생들을 가르쳤다. 부족한 기숙사 시설을 보완하기 위해 병원의 3층 병실 한 쪽 까지 학생들에게 내줬다.

이런 모두의 노력 덕분이었을까? 우리 대학 1회 졸업생이 서울대 간호학과를 제치고 국가시험 1등을 차지 했다. 1회 졸업생뿐 아니라 2회, 3회 졸업생도 국가시험 1등의 자리를 거머쥐었다. 실습 위주로 공부했던 터라 실제 병원에 가서 타 대학학생들보다 빨리 인정받았다. 취업도 잘 했고 잘 됐다. 초반에 학교 이름을 보고 무시하던 실습 병원 사람들도 학생들의 실력과 인성에 놀라 실습이 끝날 무렵엔 병원에 남아달라는 부탁을 했다.

이렇게 1회 졸업생들은 넉넉지않은 환경 속에서 난관을 헤쳐나가며 우리 대학의 초석을 닦았다. 이들의 노력 덕분에 후배들은 풍족한 환경에서 학업에 매진할 수 있게 되었고, 실습 현장에서도 눈치 보지 않고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최초’라는 위치는 그저 주어진 것이었지만 그 자리를 영광스럽게 만든 것은 1회 졸업생들 스스로였다.

국가시험에 합격하려면 평균 60점만 넘으면 됩니다.
다른 학교는 선배들도 있고
시험 출제 유형도 알고 있었지만,
저희는 신설 학교라 그런 게 없었습니다.
대신 정영수 학장님은 저희한테
의사가 하는 일까지 전부 다 가르쳐 주셨습니다.

학교로 올라가는
오른쪽 언덕에
학생들이 직접
코스모스 씨앗을 뿌리고
코스모스밭을 만들었습니다.

국가시험 합격
제일 많이 되는 학교

학교 설립 초창기, 정영수 박사가 가장 역점을 둔 부분은 좋은 선생님들로,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단단한 교수진을 꾸리는 일이었다. 설립의 뜻에 맞게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교육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게 품질 좋은 가르침을 제공할 수 있는 교수진을 확보해야 했다. 우선 진주시에서 활동 중인 의사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영수 박사는 이미 1966년부터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의료인들을 중심으로 로터리 클럽을 창설하고, 이를 중심으로 경남지역 의료발전에 크게 기여해온 터였다. 지역 헌신의 선의(善意)는 지역 사람들의 큰 신임을 불러왔다. 이에 정영수 박사는 1970년부터 1973년까지, 또 1978년부터 1981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진주시의사회 회장직에 선출될 수 있었다.

이 시기 다져놓은 단단한 인적 네트워크가 비로소 빛을 발했다. 정영수 박사의 부름에 지역 내 많은 의료인들이 기꺼이 화답했다. 자신들의 시간을 쪼개 병원과 학교를 오가며 학생들에게 양질의 강의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급한 환자 때문에 불가피하게 강의를 쉬어야 할 경우에는, 저녁 늦은 시간이라도 반드시 보충 강의를 진행하며 학생들과 함께 학구열을 불태울 정도였다.

한편 훌륭한 전문 간호원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충실한 이론에 더해 적절한 실습이 필수였다. 그러나 이제 막 개교한 학교가 그럴듯한 ‘실습실’까지 갖추기는 역부족 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진주 시내 병원들도 마찬가지라 학생들의 실습을 위한 설비와 공간을 좀체 찾기 어려웠다.

이번에도 정영수 박사의 인적 네트워크가 또 한번 빛을 발했다. 진주시의사회 회장직을 맡는 동안 쌓아 올린 다방면의 덕망 덕분에, 오래지않아 부산이나 서울 등 대도시 소재 종합병원에서 실습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초창기 진주간호 전문학교 졸업생들은 대도시 간호 학교 학생들에 못지않은 역량을 갖출 수 있었고, 졸업후에도 비교적 양질의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설립자의 정성을 다한 마음에 학생들도 부단한 노력으로 답했다. 어쩌다 휴강이 되어도 교문 밖을 나서지 않고 강의실에 남아 공부하는 풍경이 초창기 진주간호전문학교 학생의 일상이었고, 국가시험이 다가오면 방학도 스스로 반납하고 공부에 매진해 나갔다. 학교 최초의 운영진들도 학생들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겨울이면 뜨거운 물주머니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전해 주었고, 복사기가 없던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임에도 인근 초등학교를 방문해 수많은 모의 고사 시험지를 일일이 등사해 전달 했다.여성교육에 대한 인식이 척박하던 당시의 사정을 감안해 가정 방문에도 적극적이었다. 학부모들에게 학생들이 치러야 할 시험의 어려움과 중요성을 일일이 설명하며, 학업에 집중할 수 있는 면학 분위기 조성을 위한 협조를 요청했다. 국가 시험 당일이면 좋은 성과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 학생들을 직접 시험장에 실어나르는 풍경도 심심치않게 볼 수 있었다.

진심을 다하면 하늘도 감동한다 했던가. 이러한 지원과 노력의 결과, 당시 진주간호전문학교 제1회 졸업생들은 무려 87%의 높은 국가시험 합격률을 보이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한 번 기틀이 잡힌 진지한 면학 분위기와 학생들을 제 자식처럼 챙기는 가족적인 문화는 이후 ‘진주보 건대’의 대를 이을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그 결과 눈에 띄는 성과들이 연이어 쏟아졌는데, 4회 졸업생들 중에선 전국 수석이 배출되었고 6회 졸업생의 경우에도 전국 3위 성적을 거둔이가 나타났다. 전국 합격률이 채 60%에도 못미치던 당시 간호 국가시험 수준을 감안할 때, 이는 설립자 정영수 박사와 이사진, 그리고 교수진과 학생들이 보인 눈물겨운 노력에 대한 아름다운 보상이라 평가할 수 있었다.

좋은 선생님이 계시다면
전국 어디라도
직접 발품을 팔 생각입니다.

갤러리 이미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