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전문대학의 시대’가 열렸다. 1970년대 말 시행된 학제 개편의 결과였다. 문교부(현 교육부)는 1978년 1월, 5월 말까지 각 전문학교의 운영 실태를 조사하고 6월 중 으로 전문대학 심사를 거쳐 자격을 갖춘 학교는 ‘전문대 학’으로 승격시킨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전문학교, 실업 고등전문학교, 초급대학은 전문대학으로 단일화되었다.
1978년 7월 4일 대통령령 제9078호로 ‘전문대학 설치 기 준령’이 공포되었다. 주요 골자는 전문대학의 설치와 운 영에 필요한 교원, 시설, 설비 등에 기준에 관한 내용이 었다. 기준령이 제시한 기준에 못 미치는 학교는 조건부 로 승격되거나 각종 학교로 격하되었다. 대략적인 기준 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대학역시문교부의방침에따 라 전문대학으로 승격을 준비했다. 1978년 8월 20일 문교부에 한가람 학원 이사장 김은영 선생과 간호전 문학교장 고(故) 정영수 선생의 이 름으로 전문대학 인가 신청서를 제 출했다. 인가 신청서에는 “대한민국 교육의 근본이념에 의거하여 고등 교육을 실시하려 인격을 도약하며 보건간호교육을 실시”라는 진주보 건대의 염원을 담았다.
이제는 평가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 다. 당시 재직하던 이사진과 전임 교원 선생님들은 전문대학이 되기 를 간절히 기원했다. 개교부터 독립 된 교사(校舍)를 가지고 훌륭한 교 수진을 보유했던 우리 대학이 승격 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인가 신 청 후 방문한 평가교수진도 매우 만 족할만한 시설과 훌륭한 교수진을 확보하고 있다는 평가를 내렸다.
인가 신청서를 제출한 바로 다음 해, 진주간호전문학교는 학교가 아 닌 ‘대학’이라는 타이틀을 걸게 되었 다. 타이틀의 전환에 따라 학교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대학으로 승격 되며 교장은 ‘학장’으로, 선생은 ‘교 수’로, 학생들은 전문학교 학생이 아 닌 ‘진주간호전문대학’에 다니는 ‘대 학생’이 되었다. 운영방식 또한 학 점제로 바뀌었고, 대학 입학 예비고 사에 합격한 합격자에 한해 입학의 기회가 주어졌다. 명실상부한 우리 나라의 고등교육기관이 된 순간이 었다.
① 전문대학에는 학과마다 전임강사이상의 교원을 5인이상 둘 것
② 조교를제외한교원의교수시간은1인당매주9시간을기준으로할것
③ 교사에는 강의실, 실험실습실, 교수연구실, 사무실, 도서관, 시청각실, 의무실, 식당,학생휴게실기타교육및후생에필요한시설을갖출것
④ 도서관의도서는학과당500권이상,도서외학술잡지2종이상을비치할것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막 봄이 시작되려던 무렵 우리 대 학에 큰 슬픔이 찾아왔다. 정영수 박사의 죽음이었다. 그 누구도 준비되지 않은 갑작스러운 비보였다. 그의 나이 겨우 58세였다. 이루고자 한 것도, 이루어야 할 것도 너 무 많던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다. 갑작스 러운 그의 죽음은 우리 대학은 물론, 진주 지역사회와 의 료계에 큰 충격이었다. 많은 이들의 슬픔과 허망함 속에, 1981년 2월 27일 진주보건대학교의 큰 별이 졌다.
살아생전에 고(故) 정영수 박사는 간경화를 앓고 있었 다. 지속된 간의 염증이 제때 회복되지 못해 간이 굳는 질환이었다. 활동 가능한 간세포 수가 적어지면서 간의 혈액순환이 방해되어 여러 합병증으로 이어지는 위험한 병이었다.
그러나 지병에도 불구하고 학교의 뜻을 세우고 첫 삽을 뜬 1970년부터 그는 학교 운영에만 매진했다. 학교를 위 해 새벽 1~2시까지 일을 놓지 못했고 새벽을 학교와 병 원에서 보내기 일쑤였다. 그의 머릿속엔 오직 진주보건 대학교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학생과 대학의 미래, 더 나 아가 경남지역과 국가를 위해 그는 헌신했다. 학생들을 위한 그의 노력은 억척스럽다는 말이 모자랄 정도였다.
불도저 같은 추진력으로 초대 학장 을 역임하며 전문학교를 전문대학 으로 승격시켰고, 보건 계열까지의 확장을앞에두고있었다.그가헌 신하는만큼우리대학과경남의료 계는 발전했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건강은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정영수 박사의 영결식이 슬픔 속에 진행됐다. 검은 상복을 입고 그의 마지막 길을 찾아온 이들의 얼굴은 비통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흐르는 눈물을 아무리 훔쳐봐도 슬픔은 이 루말할수없었다.학생들과선생 에게고(故)정영수박사는곧진주 보건대였다. 지역 의료계와 교육계 뿐만 아니라 국가를 위해 헌신했던 그는 그렇게 진주시 문산면 소문리 에 위치한 선산에 고이 묻혔다.
그래도봄은온다.슬픔에잠긴우 리대학에다시봄이찾아왔다.그 해캠퍼스는기존보다훨씬많은신 입생으로 북적였다. 고(故) 정영수 박사가 염원하던 보건계열 학생들 이 입학했기 때문이다. 보건행정과 40명, 치위생과 40명, 임상병리과 40 명총120명의보건계열학생들이 새로 들어왔고, 기존 간호과도 40명 증원된 120명이 입학하게 되었다. 총입학정원은 240명으로 기존 간호 과 80명에 비하면 3배에 달하는 정 원이었다. 설립자는 떠났지만 우리 대학은 양적 팽창이라는 새로운 시 작점에 서 있었다.
1922년 경남 진주에서 출생
1939년 진주고등보통학교(현 진주고) 졸업
1947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1953년 전란 때 의료계에 투신한 전과로 충무무공훈장* 수상 1956년 진주 정영수 병원 개원
1972년 진주간호전문학교 설립, 초대학장 취임
1974년 동아의료문화상** 수상
1977년 국민포장*** 함흥장 수상
1981년 경희의료원에서 사망
고(故) 정영수 박사가 떠난 그해는 또 다른 시작이었다. 우리 대학에 보건 계열의 학생들이 새로 입학한 것이다. 간호과뿐이던 대학에 보건행정과 40명, 치위생과 40명, 임상병리과 40명 총 120명의 새로운 인재가 입학했다. 예년보다 많아진 신입생으로 입학식은 그 어느 때보다 북적였다. 이 모습을 보지 못하고 떠난 고(故) 정영수 박 사가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간호과뿐이던 대학에 보건 계열을 신설하는 것은 고(故) 정영수 박사의 마지막 염원이었다. 진주 지역뿐만 아니 라 전국적으로 우리 대학 간호과는 명성이 자자했다. 그 러나 고(故) 정영수 박사의 꿈은 훨씬 더 컸다. 애초에 지역 의료 서비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설립한 학교였 다. 지역 의료 발전은 그의 사명이자 반드시 이뤄야 할 꿈이었다.
앞으로 병원이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선 추가적으로 보건 인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러기 위해선 전문적인 보건 인재 양성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인력들이 우리 대 학 학생들이길 소망했다. 개교 이후 600여 명 이상의 간 호 인재를 배출한 우리 대학에 새로운 목표가 생긴 것이 다. 목표가 생겼으니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다. 한번 마음 먹은 것은 반드시 이뤄내는 그였기에 밤낮없이 보건계열 신설에 애썼다.
드디어 교육부로부터 우리 대학에 보건 계열을 설치해도 좋다는 인가 를 받았다. 바로 그해 보건행정과, 치위생과, 임상병리과를 신설하고 다음 해부터 신입생을 받았다. 간호 과까지 증원해 총 240명의 학생이 입학했고 예년에 비하면 괄목할만 한 성장이었다. 그 후 1981년 후반 추가로 치기공과를 신설하고 간호 과 정원은 120명에서 160명으로, 임 상병리과는 40명에서 80명으로 증 원하며 총 360명의 정원을 받을 수 있는 지역의 큰 대학으로 성장했다.
보건 계열의 신설과 확장으로 우리 대학의 이름은 자연스럽게 진주간 호전문대학에서 진주간호보건전문 대학으로 변경됐다. 간호전문대학 이라는 이름만으로는 신설된 보건 계열을 품을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교명은 1981년 10월부터 1999년 9월까지 17년간 사용되며, 현재까지 도 가장 오래 사용된 교명으로 기억 되고 있다.
개교 이후 진주간호보건전문대학이 되기까지의 입학정원 비교
1972년 | 1981년 | 1982년 |
---|---|---|
간호과 80명 | 간호과 120명 | 간호과 160명 |
보건행정과 40명 | 보건행정과 40명 | |
치위생과 40명 | 치위생과 40명 | |
임상병리과 40명 | 임상병리과 80명 | |
치기공과 40명 | ||
입학정원 80명 | 입학정원 240명 | 입학정원 360명 |
1994년 수능 이전 학력고사제가 있었다. 해방 이후 지금 까지 우리나라 대학 입학 제도는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1954년도 국가 주도의 국가시험이 시행되기 이전 대학입 학 전형제도는 전적으로 대학의 몫이었다. 대학의 목적 에 맞게 모집 단위부터 정원, 시험 시기와 전형 유형까지 모두 대학이 자율적으로 정해 운영했다. 하지만 정원 확 보를 위한 부정입학 등의 문제가 지속해서 불거지자 대 학 입학자의 수준을 제고하기 위해 국가가 관여하기 시 작했다.
대학예비고사가 치러지던 시절 우 리 대학은 전문학교에서 ‘대학’으로 승격됐다. 이전에는 대학 입학 예비 고사의 합격 여부와 상관없이 입학 자격이 주어졌다면, 이제는 대학 입 학 예비고사 합격자에 한해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예비고사에 합격했 다고해서대학에입학할수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학별로 치러지는 대학별 고사, ‘본고사’라 불리던 시 험에합격해비로소해당대학의학 생이 될 수 있었다.
대학으로의 전환과 동시에 진주보 건대학의 문턱은 한층 높아졌다. 그 러나 전문학교이던 당시에도 이미 대학 입학생의 1/3은 예비고사 합격 군이었다. 대학으로 승격되고, 학력 고사제로 전환되기 이전에도 이미 진주보건대학은 우수한 인재들이 입학해 있었다.
1980년 ‘7·30 교육조치’에 따라 본고 사가 폐지된다. 본고사로 인한 과열 된과외와입시에대한이중부담이 그 원인이었다. 더불어 과외 금지와 고교내신성적 강화와 같은 조치가 함께 등장했다. 학력고사 50% 이상, 내신 30% 이상으로 학생을 선발했 으나,대학서열화,고교간내신형 평성, 객관식 문항에 따른 창의력 저하 등의 부작용도 대두됐다. 변화하는 교육 지침을 우리 대학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우리 대학은 매년 신입생 모집 요강을 발표하며 학생들의 입학을 도왔다. 시기에 따 라 학력고사와 내신의 비중을 달리 하며 우수한 학생들을 모집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접수 기간엔 원서 를 접수하러 온 학생들과 학부모들 로 학교가 가득 찼다. 교직원들은 주말까지 반납해가며 학생들의 원 서를 받았다.
학력고사와 학교에서 우수한 내신 성적을 받았다고 해서 대학에 입학 할수있는것도아니었다.마지막으 로 대학에서 진행되는 면접과 신체 검사까지 마친 후에야 합격의 기로 에설수있었다.매년대학게시판 엔 합격자가 발표되었고, 그날이면 합격의 기쁨과 불합격의 눈물이 게 시판앞에서교차했다.그시절펼쳐 졌던 우리 대학의 진풍경이었다.
우리 대학이 세워진 지 50년이 됐다. 작은 묘목이 커다 란 느티나무가 되는 시간이었다. 우리 대학은 성실동 위 치의 2층짜리 작은 건물에서 시작되었다. 벽돌과 하얀 페인트로 꾸며진 본관 건물을 사람들은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불렀다. 깔끔하고 단아한 분위기의 건물은 ‘백의 의 천사’였던 간호과 학생들에게 꼭 어울리는 모양새였 다.
1970년대 경남지역에서 독립된 교사(校舍)를 가졌다는 것 자체가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개교 당시에 본관 건물 은 공사 중이었는데, 수업하는 데 무리는 없었다. 그러나 바닥 마감도 채 되지 않은 학교 건물에 학생들은 적잖이 당황했다고 한다. 그후 2년 뒤인 1974년, 드디어 공사가 끝났다. 다수의 강의실과 교학과, 학보사 등의 공간을 확 보한 엄연한 학교가 세워진 것이다. 이후 늘어나는 교직 원과 학생들을 수용하기 위해 본관은 지속적으로 넓어지 고 높아졌다.
해가 갈수록 우리 대학은 더 이상 단일건물만으로는 학 생들을 수용할 수 없었다. 1985년 우리 대학은 결단을 내 렸다. 본관 옆에 위치한 진주시 상봉서동 833-1번지의 체비지(替費地)*를 매입한 것이다. 1986년 당시 교사동 (현 창의동)이라 불리는 새 건물의 공사가 시작됐다. 착 공 전 추가로 소룡골의 체비지까지 매입하며 우리 대학 은 부지 16,828m², 건물 면적 9,419m²의 토지를 보유하게 됐다. 문교부에 5차 건축허가서를 제출한 끝에 건축 인 가가 떨어졌다.
지하 1층, 지상 5층의 대규모 공사가 시작됐다. 지금의 창의동의 기틀이 되는 건물이다. 그동안 부족했던 실 습실과 강의실은 물론, 학생 편의를 위한 도서실과 휴게실도 넓힐 예정 이었다. 넓은 건물과 좋은 시설에서 공부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행된 공사였다. 그러나 신축 건물 준공에 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공사하는 과 정에서 학교 이용의 불편함과 공사 예산 문제로 학생들과의 마찰을 빚 기도 했다. 공사가 마무리되던 시점 에는 기존 시공회사의 부도로 시공 회사가 변경되면서 예정보다 3개월 뒤인 1992년 6월에 완공됐다.
이에그치지않고우리대학의건 물은 학교의 성장과 함께 지속적으 로 발전했다. 1998년 신축한 창의동 의 6.7층(현재는 8.9층)을 추가로 증 축하고, 창의동 옆 현재의 봉사동을 새로 짓게 된다. 2001년 공사를 마 친 우리 대학에는 '성실', '봉사', '창 의'라는학훈과같은이름의세건 물이 우뚝 서게 됐다. 2010년엔 현 재우리대학의얼굴이라할수있 는대학본관신축공사가이뤄졌 다. 연면적 10,942.57m², 9개 층의 대 규모 공사였다. 주차장 시설까지 겸 비한 대학 본관에는 기존에 없었던 컨벤션홀과 대학 사료관까지 들어섰다. 2016년, 우리 대학의 시작이 었던 성실동의 재건축이 진행됐고, 개교 당시의 성실동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층 1동으로 출발했던 우리 대학은 현재는 4동의 건물로 번듯한 대학 으로 자리 잡았다. 격세지감(隔世 之感)이 느껴지는 50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렇게 학교 건물은 학생들과 우리 대학과 함께 성장했다.
1974.12.16 교사동(현 성실동)준공(철근콘크리트 슬라브조 2층 1,176m²)
1976.08.02 본관 건물증축 준공(철근콘크리트 조 2·3층 490.51m²)
1982.07.24 본관(현 성실동) 건물증축 준공(철근콘크리트 조 1층 식당·2·3층 824.43m²)
1983.04.01 본관(현 성실동) 건물증축 준공(철근콘크리트 조 2·3·4층 1,141.65m²)
1986.11.01 교사동(현 창의동) 신축공사 착공(철근슬라브조 지하1층 지상5층 5,454.12m²)
1992.03.03 교사동(현 창의동) 신축공사 준공(철근슬라브조 지하1층 지상5층 5,454.12m²)
1998.03.25 봉사동 9개층 신축 및 창의동 8. 9층 증축공사 착공(연면적 9,983.3m²)
2003.10.02 봉사동 9개층 신축 및 창의동 8. 9층 증축공사 준공(연면적 9,983.3m²)
2004.01.09 한가람학사 신축공사 착공(건축면적526.55m² 연면적 4,996.94m², A, B동 각 5개층)
2005.08.17 한가람학사 신축공사 준공(건축면적526.55m² 연면적 4,996.94m², A, B동 각 5개층)
2010.11.30 대학본관(현 본부동)(신축공사 착공(건축면적 1,373.63m² 연면적 10,942.57m², 총 9개층)
2014.04.14 대학본관(현 본부동)(신축공사 준공(건축면적 1,373.63m² 연면적 10,942.57m², 총 9개층)
2016.03.15 운동장주차장 증축 착공 연면적 총 3,026.94m² 주차댓수 100대
2016.10.19 운동장주차장 증축 준공 연면적 총 3,026.94m² 주차댓수 100대
2017.03.23 성실동 재건축 착공(건축면적 1,177.59m² 연면적 4,724.32m², 지상 5층 규모)
2018.01.09 성실동 재건축 준공(건축면적 1,177.59m² 연면적 4,724.32m², 지상 5층 규모)
2018.08.13 성실동 필로티 증축 준공(면적 1,049m²) (연면적 총 5,773.32m²)
우리 대학엔 언론을 담당하는 세 부서가 있다. 학보사와 교지편집실, 교육방송국이다. 그중에서 가장 오래된 부 서가 바로 ‘학보사’다. 개교와 동시에 창설된 우리 대학 최초의 언론이었다. 1983년 도서관과 학생생활상담실이 설치되기 전까지 우리 대학의 유일한 부속기관이기도 했 다. 학보사 조직은 발행인인 학장과 주간교수, 편집장, 정기자와 수습 기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1972년 6월 3일 <진주간호전문대학학보> 제1호가 발간 되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되지 않은 시절, 학보는 학교 의 동향을 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매체였다. 우리 대학 뿐만 아니라 타 대학 학생과 외부인도 학보를 통해 우리 대학의 소식을 접했다. 학보사의 기자들은 학교의 소식 을 안과 밖으로 부지런히 실어날랐다.
2001년 학보에 실린 21기 새내기 기 자를 모집하는 광고의 문구다. 문구 처럼 과거에도, 지금도 학보사 기자 들은 도전정신과 근성으로 똘똘 뭉 쳐있다. 비록 학생 기자의 신분이었 으나 언론인으로의 소임을 충실히 수행했다. 학업과 실습을 병행해야 하는바쁜학과생활속에서도우리 대학의 이야기를 기록했고, 때로는 언론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학교에 대한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2002년까지 학내 동향, 사회·정치, 교수·학생 논단, 문화 총 4면으로 구 성된 학보는 연간 4회 각 3,500부가 발간되었다. 이후 2002년 3월부터 독자에게 익숙한 타블로이드판형으 로전환해12면구성으로연간5회 각 2,700부씩 발간되었다. 현재는 8 면으로 줄어들었으며 매 학기 2회 (3월, 5월, 9월, 11월) 1,000부씩 발 간되고 있다. 비록 시대가 변하면서 발행 횟수나 부수는 줄어들었지만, 학보사는개교이래로한해도빠짐 없이우리대학의역사를기록한유 일한 곳이다.
학보가 학교의 동향을 훌륭하게 전 해주었지만, 발행 면수의 제한이라 는한계로다루지못하는학교의이 야기들도 있었다. 다루지 못한 이야 기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1988년 ’ 교지편집실’이 탄생한다. 교지편집 실은학보와달리발행면수의제한 이없어,보다다양한학교의이야 기를다룰수있었다.
게다가 교지는 소수의 선발된 인원 만이 제작할 수 있었다. 신입생을 중심으로 치루는 1차 필기시험과 2 차면접을통과한8명의수습기자 중, 1년간의 혹독한 트레이닝을 마 친이에게비로소교지편집의권한 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선발 된학생들은한해동안있었던학 교의 이야기들과 학생들의 말들을 모아 매년 교지를 펴냈다.
이후 1993년 9월 1일 ‘교육방송국’이 생겼다. 당시 방송국은 대학에 있 어야 하는 필수 기관이었고, 1985년 교수·학생 좌담회부터 방송국 설치 는 학생들의 요구 사항이었다. 이후 신관(현 창의동) 준공과 함께 우리 대학에도 방송국이 설치되었다. 방 송국의학생들은매일오전,오후2 회의방송을통해학교와지역의소 식을 신속하게 전했다. 그뿐만 아니 라교양을위한음악,영화에관련 된문화방송과시사교육방송도 진행했다.
이렇게우리대학언론기관들이탄 생했고,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이어 지고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도우며 학교의 소식을 전하고 기록 했으며, 앞으로도 계속 우리 대학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전달하는 역할 을 다할 것이다.
대학 동아리, 단어만으로도 설레고 캠퍼스의 젊음과 낭 만이 느껴진다. 동아리의 중심은 학교가 아닌 학생이다. 만드는 것도, 운영하는 것도 모두 학생들의 몫이다. 그렇 기에 동아리 활동은 ‘대학 생활의 꽃’이자 ‘낭만의 상징’ 이 되어왔다. 우리 대학에도 현재 수많은 동아리가 존재 하며, 제각기 그 몫을 해나가고 있다.
하지만 개교 때부터 동아리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전문 대학 승격과 함께 1979년 4월 9일 우리 대학의 최초의 동 아리 ‘반야회’가 등록됐다. 이후 산악동아리 산악부, 종 교동아리 가톨릭학생회 등이 차례로 등록되며 대학의 면 모를 갖춰나갔다.
학생의 증원과 학과 개설로 다양한 학생들이 입학했다. 그와 더불어 동아리의 성격도 점차 다양해졌다. 늘어난 학생만큼 각기 다른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고, 학생들은 주도적으로 동아리를 개설하고 운영했다. 예술, 봉사, 종 교, 건강 등 다양한 종류의 동아리가 창설됐다. 학생들은 동아리 활동을 통해 학과 공부에선 배울 수 없는 것을 배 운다. 선후배 간의 끈끈한 정, 서로를 이해하는 법, 조직 을 운영하는 법 등 전공 이외의 소양을 기를 수 있다.
시대와 학교의 변천에 따라 동아리는 생겼다 사라지기도 했다. 정보화가 시작되면서 사무자동화과가 개설되었을 때 생겼던 ‘해누리’가 대표적이다. 학과가 폐지되고 인터 넷이 대중화되면서 동아리도 함께 폐지되었다. IMF 이 후경제위기가고조될땐취업이나학술에관련한동아 리가 인기가 많아지기도 했다.
현재는 우리 대학은 학교의 특성에 맞게 봉사 동아리가 대세다. 총 34개의 동아리가 활동 중이며 이중 11개의 동 아리가 봉사 동아리다. 동아리 활동을 통해 학생들은 의 료기술이필요한지역사회와사회취약계층에헌신하 고 있다.
구분 | 동아리명 | 설립 연도 | 주요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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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 | 건강보감 | 2002 | 지역사회 봉사활동, 시설봉사(성심원) |
금연 동아리 | 2015 | 금연 홍보 활동(금연 세미나, 금연캠프) | |
호스피스 | 2018 | 호스피스 자원봉사 교육 및 암환자 봉사활동 | |
心心봉사 | 2019 | 지역사회 재능기부 봉사활동 | |
힐링케어 | 2016 | 미용건강 관련 프로그램화 및 봉사활동 | |
AtoZ | 2016 | 거리정화활동 및 헌혈캠페인 | |
카리타스 | 2014 | 사회복지시설기관, 복지 행사 지원 활동 | |
RCY | 2009 | 적십자회 교외 봉사활동 | |
새진주 레오클럽 | 2011 | 교내외 환경정리 및 지역사회 봉사 | |
희망파트너스 | 2019 | 생명지킴이 게이트 키퍼 교육, 심리학 도서와 함께하는 희망 파트너스 활동 | |
JHC Social Volunteering | 2022 | 지역사회 사회복지기관 및 시설 연계 정기 사회봉사 | |
전공 | 예술치료와 간호 | 2016 | 음악,미술,문학,영화등예술활동경험과토론,예술치료관련자격증준비 |
하울림 | 2016 | 간호전공학습 및 최신 간호동향 논문 읽기, 토론, 지역아동센터 보건 교육 | |
NCLEX-RN 준비동아리 | 2021 | 전문직간호사 지식 기술습득을 위한 NCLEX-RN 준비 및 영어역량 강화 | |
하트비트 | 2016 | 자발적 교내외 봉사활동 실시, 심신단련 | |
나도 간호사 | 2016 | 학과 핵심술기 관련 프로그램 서포터즈 활동, 경진대회 참여 등 간호술기술 유능성 증진활동 | |
Fun Fun | 2015 | 글로벌 및 지역사회에서의 간호사 역할 관련 주제토의, 전공교과목 탐색, Nursing Skill 탐색 | |
보행화랑도 | 2020 | 보건행정관련공무원및자격증준비 | |
청출어람 | 2019 | 보건전공자격증정보공유및지역사회봉사 | |
의학용어 전공동아리 | 2019 | 전공관련 면허 및 자격시험을 위한 의학용어 시스템별 학습 활동 | |
호연지기 | 2018 | 임상생리학 전공실습 능력향상을 위한 활동 | |
TLC(Tender Loving Care) | 2021 | 자기계발 활동을 통한 취업능력 개발, 전공활동을 통한 전문성 강화 및 진로설계 | |
조직 | 2022 | 조직병리 표본제작 | |
Hope 9020 | 2022 | 지역주민, 특수계층 대상 구강보건교육 실시, SNS활용 구강보건교육매체 제작 | |
SOOD | 2022 | SOOD Technique 적용 구강보건교육 실시 및 구강위생관리법 홍보 | |
종교 | 가톨릭 학생회 | 2017 | 학내 성서 스터디 |
창업 | 美마스터 | 2021 | 샵마케팅기획,프로그램개발등체계적창업역량지원및예비창업자발굴 |
JHC 크리에이터 | 2020 | 교내 예비 창업자 발굴 및 체계적인 창업역량 개발지원, 창업 분위기 활성화 | |
DTS(Dental Technician Student) | 2021 | 치과기공 관련 창업준비, 지식습득 및 창업역량 강화, 치과기공 기자재 개발 역량 함양 | |
이클립스 | 2022 | 스마트제어기반의시각화앱개발에따른예비창업자발굴및역량개발 | |
사랑니 | 2022 | 치위생 산업 관련 창업역량 강화 | |
취미 | 루미에르 | 2018 | 학교 스포츠 활성화 및 풋살을 통한 협동심 강화 |
LABYRINGTH | 2021 | 댄스팀 활동 및 커버댄스, 창작안무영상 제작 | |
학술 | GLOBAL NOMAD | 2022 | 영어 듣기와 말하기 중심의 실용적 영어 교류(회화 스터디, 프리토킹 등) |
한센병은 일제강점기 시행된 강력한 격리 정책과 치료 제가 개발된 1940년까지 한번 걸리면 약이 없는 ‘천형’으 로 국민들에게 알려진 질병이었다. 1943년에 디디에스 (DDS)라는 치료제가 개발되고 1950년대 중반부터 약이 대중적으로 보급되면서 한센병의 전염성은 극히 낮아졌 지만 국민들의 인식은 여전히 ‘피해야 할 전염병’일 뿐이 었다. 사회적 인식이 이렇다 보니 한센병을 치료하는 시 설의 열악함과 치료를 위한 의료인들이 부족한 것은 어 쩌면 당연했다.
전문 간호원을 양성하여 간호원 인 력부족현상을해결하고지방의료 계에 이바지하는 인재를 기르고자 했던우리대학에서이런상황을모 른척할순없었다.우리대학간호 과 교수와 학생들은 1976년부터 매 년 소록도로 정기 봉사활동을 가기 시작했다. 직접적인 의료활동을 할 순 없더라도 장기화된 인력난에 손 이 부족한 소록도의 일손을 도왔다. 또한오랜시간동안격리되어외로 운 환우들을 위해 위문공연을 준비 하고쉬는시간엔환우들의손을잡 고눈을맞춰이야기를나누는봉사 를 꾸준히 이어갔다.
1984년 6월 12일. 그날도 어김없이 소록도를 찾아 환우들을 살피던 학 생들에게 건넨 한마디였다. 환자들 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의료인의 사명을 갖고 매년 소록도를 찾아온 학생들이었지만 이제 막 스무 살을 갓 넘긴 어린 학생들이 마주하기에 두려움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병 으로 인해 손가락이 뭉개지고, 입이 비뚤어졌지만 환하게 웃는 할머니, 절룩거리며 목발을 짚고 다니지만 활발하게 활동하는 젊은 환우들의 모습은 오히려 학생들에게 깊은 울 림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