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지옥의 치열한 경쟁은 뜨겁다 못해 '지옥문'이란 신 조어를 만들어 낼 정도였다. 1980년대를 휩쓴 교육열은 후반으로 갈수록 그 열기가 더 달아올라 여러 사회문제 를 불러일으켰다. 입시 노이로제의 만연, 대규모 재수생 양산, 학벌주의와 사회적 불평등의 고착 등등. 이런 상황 에서 정부가 입시난 해소를 위해 유력한 대안으로 주목 한 것이 바로 ‘전문대학’이었다.
1990년대를 여는 첫해부터였다. 당시 문교부(현 교육부) 는* 전체 지원자 3분의 2에게 재수의 쓰디쓴 경험을 안 길, ‘4년제 대학 편중현상’을 완화시키려 했다. 이를 위해 새로운 학교의 설치와 몇몇 학과의 집중적인 증원을 내 용으로 하는 전문대학 확대 정책을 펴기 시작했고, 특히 증원의 대상으로 생산현장 기반 기술을 연마할 수 있는 학과, 취업률이 높은 학과, 3차 산업 관련 학과, 여성 전 문인력을 양성할 수 있는 학과들을 콕 짚어 제시했다. 이로써 우리 대학 역사에도 ‘증과와 증원’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우선 1991년 10월에는 관 광중국어통역과를 신설해 120명 정 원을 추가했고, 기존 치위생과에는 야간부를 새로 설치하며 40명에서 120명까지 정원을 늘렸다. 비단 특 정한한해에그치지않았다.당초 우려와달리별탈없이신설및증 원 학과의 운영이 이뤄지자 1992년 말미에도 2개 학과의 신설을 결정했 다. 80명을 정원으로 하는 사무자동 화과와 40명 정원의 관광통역과를 새로 개설했던 것이다.
작은걱정이큰불안으로자라난건 두 번째 증과 결정 이후였다. 1993 년도의 개강을 앞두고 대학 내부에 서 문제의식이 불거졌다. 무엇보다 공간과 시설의 부족을 걱정하는 목 소리가 컸다. 겉보기에도 좁아 보이 는우리대학의부지면적과자그 마한건물로그많은학생들을제 대로 품어낼 수 있느냐는 얘기였다. 또신설학과대부분이컴퓨터,전 자기기, 시청각 교육시설 등 실습시 설이필요한계통임을감안할때시 설미비문제도걱정의핵심원인중 하나였다. 더구나 교수 1인이 학생 40~50명을 도맡아 지도하던 시절이 었다. 기존의 교원이, 갑자기 늘어 난학생수를감당하기쉽지않을 것임은 구태여 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대학 운영진이 이러한 걱정 을모를리없었고,그들에게도그 들만의 사정이 있었다. 우선 정부 가강하게드라이브를걸고있는교 육정책의큰흐름을거스를수없었 다.또한우리대학의지속적인발 전을 위해서는 적어도 2,000명 이상 의학생수가필요했기에,외형확 장결정은이시기피해갈수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제 불필요한 논쟁은 피하 고,우리대학의미래성장을위한 방향성을 명확히 정립해야 할 때였 다.“불어난정원에걸맞은수용능 력갖추기”,점차커지고있는학내 요구에 응답해 이처럼 명확한 비전 을가지고선두에나선이가있었 다.당시제6대학장취임을앞두고 있던현정종권총장이바로그주 인공이었다.
① 생산현장기반기술분야 → 금형·도금·용접
② 취업률이높은분야 → 기계·전기·전자·통신
③ 3차산업관련분야 → 사무자동화·전산정보처리
④ 여성전문인력양성분야 → 미용·여성교양·의상
“냉전은 끝났다”
1989년 지중해 몰타에서 열린 미·소 정상회담 이후 세계 는 냉전시대를 벗어나 새로운 시대로 들어섰다. 소련의 개혁과 개방이라는 새로운 대외정책이 가져온 결과였다. 동시에 덩샤오핑의 개혁ᆞ개방 노선을 10년 넘게 유지해 온 중국은 ‘세계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국내 기 업들에겐 진출 1순위 국가이자, 미래 성장을 위한 새로 운 동력이기도 했다.
고(故) 정영수 박사는 언제나 미래를 보는 사람이었다. 1990년대로 접어들자 변화하는 시대 흐름에 맞춰 교육의 시각을 넓히기 시작했다. 전문대학의 목표 중 하나는 국 가 사회의 발전을 위해 ‘시대에 맞는’ 전문인을 양성하는 것이다. 우리 대학은 이미 간호과가 전국적으로 입지가 굳건했음에도 창립자의 정신을 이 어받아 보건계열까지 확대하는 등 시대 변화에 기민하게 반응하며 사 회가 필요로 하는 전문인을 양성해 왔다.
이러한시대흐름에주목한우리대 학은 1991년 정부 인가를 받아 정원 120명 규모의 관광중국어통역과를 개설했다.간호및보건계열외처 음 설치된 계열로, 이러한 사회실무 계열신설과함께대학으로서한단 계 올라서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대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 다. 바로 다음 해인 1992년에는 영 어와 일어를 다루는 관광통역과를 신설했다. 중국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과 같이 한국과 밀접한 관계의 국가와 소통할 수 있는 전문인을 양 성하는 것이 목표였다.
1990년대는 정보화의 태동기이기 도했다.국제화물결은PC대중화 흐름과 맞닿아 사무실과 공공기관, 학교등사회각분야에서그보급 률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당연히 사무자동화 필요성이 크게 증가하 며사무기기를활용할수있는인 력수요가크게늘어날수밖에없 었다. 우리 대학은 이러한 사회적 흐름에 주목해 관광통역과와 함께 사무자동화과를 신설했다. 이는 진 주보건대학교 50년 역사에서 공업 계열로의 교육 범위 확장을 의미하 기도 했다.
우리 대학의 건학이념이다. 진주보 건대학교는 그간 간호·보건 계열에 서 알차게 다진 실질을 기반으로, 사회실무계열에서 공업계열에 이르 기까지 닦을 전문의 범위를 넓혀왔 다.그과정에서개설된학과가명 칭을바꾸거나몇몇학과는통합또 는폐지의수순을겪기도했다.그 러나 변화하는 시대상을 면밀히 추 적하며 그에 맞는 전문인을 양성해 내기위한우리대학의끊임없는노 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구분 | 수학연한 | 모집인(명) | 비고 | |
---|---|---|---|---|
주간 | 야간 | |||
간호과 | 3년제 | 200 | 여자에 한함 | |
임사병리과 | 3년제 | 80 | ||
보건행정과 | 2년제 | 40 | ||
치위생과 | 2년제 | 80 | 40 | 여자에 한함 |
치기공과 | 2년제 | 40 | ||
관광중국어통역과 | 2년제 | 120 | ||
관광통역과 | 2년제 | 40 | ||
사무자동화과 | 2년제 | 80 | ||
계 | 680 | 40 |
1993년은 우리 대학이 도약하는 시기였다. ‘전문대 활성 화’라는 교육부의 추진 방침에 따라 사회실무계열(관광 중국어통역과, 관광통역과), 공업계열(사무자동화과) 신 설과 동시에 기존 간호 보건 계열 정원 모집을 늘린 결과 였다. 1990년 400명이었던 입학 정원은 4년 사이에 2배 넘게 증가해 1993년 880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1990년대는 격동의 시기였다. 그만큼 변화가 많 았다. 불과 2년 후 시행된 1995년 5·31 교육개혁은 대학 제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전문대학의 위기’라는 말 도 이 시기 등장했다. 정부는 대학의 다양화, 지역의 특 수성과 각 사회 분야가 요구하는 인재를 양성한다는 목 적으로 대학 설립 준칙주의*를 시행했다. 이에 따라 대 학 설립 기준이 완화되었고, 신규 4년제 사립대학과 전 문대학 설립이 가시화되었다. 기존 대학은 위기감을 느낄수밖에없었다.우리대학도예 외는 아니었다. 고조되는 대학 경쟁 의분위기속살아남기위한변화가 필요했다.
대학 운영에 대한 중·장기적인 계획 을 세우고 운영할 부서가 필요했다. 따라서 1995년 10월 1일 기획과가 신설되었다. 사실 다른 대학에 비해 늦게 구성된 조직이었다. 당시의 열 악한상황만봐도알수있었다.다 른 대학의 경우 기획과가 예산·결산 과같은광범위한업무분야를담당 하는한편우리대학은신설단계로 당분간 다른 부서를 조력하는 역할 에 머물러야 했다. 게다가 공간조차 배정받지 못해 교수 회의실을 임시 로 이용했다.
같은 날 취업보도계도 신설되었다. 전문대학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전 문직업인의 양성이었기에 경쟁력 있는 대학이 되기 위해선 학생의 취 업률은 중요했다. 하지만 취업보도 계의 상황도 열악하긴 마찬가지였 다. 취업보도계는 상담실을 운영해 야 했기에 신관 5층에 공간을 배정
받았으나 실제로 학생들이 이용하 기엔 불편함이 있었다. 운영 인력도 직원은한명뿐이었고예산역시자 체예산이아닌학생과예산에포함 되어 편성될 예정이었다. 결정적으 로 다수의 학생이 기획과와 취업보 도계의 신설을 알지 못했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서도 각 부서 의 담당자들은 막중한 사명감을 가 지고열과성을다해부서를이끌 준비가 되어 있었다. 초대 기획과 과장인 윤대혁 교수는 함께 일하는 직원과 함께 매일 회의를 진행하며 기획과의 미래를 논의했다. 취업보 도계의 용홍출 선생은 이미 내년도 계획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취업시 면접 훈련 프로그램과 각종 간담회 와 초청강연회를 통해 다양한 취업 정보를제공할수있도록계획중이 었다.
모두각자의속도와때가있는법이 다.다른대학과비교하면늦은출 범이었지만 당시 우리 대학의 여건 을 고려했을 땐 적절한 시기였다. 바로다음해우리대학은대학내 전자계산소를 설치하고 교무과엔 실습계를 설치하는 등 빠르게 변화 에 착수한다. 징계제적자도 재입학 을허용하는등재입학기회도확대 했다. 이렇게 점차 경쟁력을 확보하 고 전문대학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 해 행정 선진화를 향해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센세이션(sensation). 깜짝 놀랄만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이 단어를 사용한다. 까만 배경화면과 흰색 텍 스트만이 전부였지만 PC통신의 보급은 가히 센세이션했 다.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이다. 1995년 조선일보엔 정보 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캐치프레이즈가 걸렸다.
우리 대학은 정보화에 앞선 편이었다. 1992년부터 사무 자동화과를 신설해 컴퓨터를 다룰 수 있는 인재를 양성 하고 있었다. 컴퓨터가 막 대중화될 무렵이었다. 컴퓨터 가격이 저렴해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컴퓨터 는 당시 웬만한 직장인의 몇 달 치 월급에 해당하는 고가 의 가전제품이었다. 개인용 컴퓨터는 여전히 부유함의 상징이었고,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 은우리대학의학생이기에누릴수 있는 일종의 혜택이었다.
1996년 8월 16일 우리 대학에 PC통 신 나우누리가 개통되며 나우누리 EYES엔 온라인통신학교 ‘진주간호 보건전문대학 정보광장’이 개설되 었다. 우리 대학 학생들뿐만 아니라 진주간호보건전문대학에 관심있는 누구나 이곳에서 대학 소개나 학사 안내와 같은 정보를 빠르게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 모든 것은 빠르게 변했다. 특히 컴퓨터와 관련한 것은 더욱 빨랐다. PC통신도 잠시 1997 년 3월 1일 대학 내 근거리통신망 (LAN)과 학술망이 개통된다. 바로 다음 달 4월 1일에 우리 대학 홈페 이지가 인터넷에 등록되었다. 학생 들은 자연스럽게 정보화 물결 위에 올랐다. 컴퓨터 동아리 ‘해누리’를 창설하기도 하고 우리 대학이 주최 한 ‘98 진주지역 전문대학 동아리 홈 페이지 제작 경진대회’에 참여해 금 상과 은상, 동상까지 수상했다. 교원들도 정보화 시대에 뒤처질 수 없었다. 앞으로 들어올 학생들은 기 존과는 다른 시대의 아이들이었다. ‘N세대’, ‘네트워크 세대’로 불리는 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컴퓨터를 학습한 최초의 세대이자, 인터넷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줄 아는 새로운 세대였다. 게다가 강의 운영 방식도 기존의 교재와 칠판 위주에서 다양 한멀티미디어도구를활용한강의 로 전환되고 있었다.
우리 대학은 교원들을 위한 멀티미 디어 교육이 필요했다. 이미 근거리 통신망(LAN)과 학술망을 개통해 놓은 덕에 교육과 실습을 진행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사무자동화
과 문수열 교수는 1998년 9월 13일 부터 3개월간 매주 토요일마다 전산 실과 소강당에서 교원들을 위한 멀 티미디어 교육을 진행했다. 개인 위 주의 실습 중심으로 진행된 교육으 로교원들은배운것을실전에바로 활용할 수 있었고, 변화하는 교육 환경에 뒤처지지 않을 수 있었다.
1990년대는 세계화의 시대였다. 앞서 언급했듯 88서울올 림픽과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의 눈에 비친 바다 건너 사람들은 더 이상 낯설고 두려운 존 재들이 아니었다. 브라운관에는 한국인보다 로컬 언어를 더 맛깔나게 구사하는 이방인 스타들이 하나 둘 출현했 고, 바쁜 일상 중 짬을 내 이웃나라를 방문하는 일이 흔 해졌다. 그렇다면 이때의 세계화란 정확히 무엇을 의미 했을까?
이처럼세계안의나를상상하며대 한민국 사회는 상호교류의 양적 증 대를 추구하는 ‘국제화’의 길로 들어 섰고,이때의우리대학역시이러 한 첫 걸음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 시작했다.
서막의 커튼을 올린 건 1994년 겨울 이었다. 이해 12월 대학 경영진은 국제교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부산 소재 일본대사관을 통해 현지 전문대학들의* 명단을 넘겨받았고, 93년에이르는유서깊은역사를가 진 한 대학에 주목했다. 나가사키대학 의료기술단기대학부. 이 대학은 1903년 나가사키현립병 원의 부속 간호부양성소로 설립되 어백년역사의신기원을앞두고있 던 학교였다. 간호과와 의학요법과 그리고 작업요법과 등 3개과에 걸 쳐360명의재학정원을지닌규슈 지방의 명성 있는 상대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우리 대학과 유사한 학과 를많이설치하고있어많은도움을 받을 수 있는 학교인데다, 익숙한 보건의료 계열에서 국제교류 노하 우를 쌓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도 매 우 적절한 첫 파트너였다. 이에 우 리 대학은 1995년 6월 2일, 나가사키 대학과 공식 교류협정을 맺고 진주 보건대학교 국제교류사의 첫 페이 지를 써내려 나갔다.
1999년에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 갔다. 호주 및 뉴질랜드를 대상으로 한 우수대학 벤치마킹 방문을 계기 로 현지 뉴캐슬대학과 상호교류 협 정을 체결했던 것이다. 호주 뉴캐슬 대학은현지연구분야에서손에꼽 히는 학교 중 하나로, 이러한 대학 과의 파트너십 체결에 성공했다는 건우리대학의글로벌위상이그만 큼 높아졌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협정의 내용을 살펴보면 더욱 의미 있는 국제교류 성과였다. 특히 간호 과와 사무자동화과를 졸업한 학생 들은 상호협정에 따라 모교 이수학 점을 그대로 인정받으며, 뉴캐슬대 학으로의 편입을 진행할 수 있었다. 따라서 졸업에서 진로 모색, 그리고 최초의 취업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학생경험을 고려한 소중한 국제교 류성과라평가할수있었다.이렇 듯 단단히 쌓아올린 글로벌 네트워 크를 기반으로 2000년대에도 꾸준 히교류범위를넓혀나갔는데,역 사적으로 의미 깊은 족적들을 가려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약속이 현실로 구현된 모범사례도 이 시기 산출됐다. 2009년 3월 9일이 었다.이날대학소강당에서는우리 대학 피부미용과 공동학위과정에 참 여하는 학생 85명에 대한 입학식이 거행되었다. 이로써 우리 대학은 선 진 교육과정을 직접 체험하며, 국제 경쟁력 향상을 위한 기반을 다져갈 수 있었다.
2007년 11월 영국 국립 브래드포드대학 피부미용과와 공동학위과정에 관한 협정 체결
2008년 1월 영국 국립 브래드포드대학 피부미용과와 공동학위과정에 관한 협정 체결
2008년 1월 호주 애들레이드 소재 주립 기술전문대학과 학술교류협정 체결
2008년 12월 스위스호텔학교와 학술교류협정 체결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 등 사회 여러 분야를 통 틀어 개인 및 사회집단이 하나의 세계 안에서 삶 을 영위해 가는 과정을 가리키는 사회학 용어
긍지의 문제였다. 매년 높은 취업률을 기록하는 대학답 게, 우리 대학 졸업생들은 사회 곳곳에서 어엿한 전문인 력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쉬움이 남았다. 4년제 대학과 달리 학위증이 그들에겐 주어지지 않았다. 전국 수많은 전문대 졸업자들의 사정이 마찬가지였다. 1979년 전문대학 제도의 시행 이래, 산업현장 일선에서 성실한 일꾼으로 기여해 왔으나 ‘학위’ 얘기만 나오면 괜 스레 움츠러들곤 했다.
‘졸업증서 말고 전문대학 졸업생에게도 학위가 필요하 다.’ 입시 과열의 대안으로 전문대 육성이 거론되며, 이 미 1990년대 초반부터 나오기 시작한 얘기였다. 그러나 책임 있는 정책 수행자의 입에서 의미 있는 답변이 흘러 나온 건 1994년 5월의 일이었다.
2년 뒤 정부의 새로운 정책안이 발표되며 그간의 열망이 현실로 바뀌기 시작했다. ‘신교육체제 수립을 위한 제2 차 교육개혁방안’, 이 혁신안에는 전문대학의 위상 강화 와 성인 인구를 위한 평생교육 체제 마련을 위해 그 졸업 생에게 전문학사 학위(Association Degree)를 수여하 도록하는내용이담겨있었다.이후1997년1월13일자 로 개정 교육법이 시행에 들어가며, 그해 2월 전국의 전 문대학들은 졸업생들에게 최초의 전문학사 학위를 수여 하게 되었다.
‘졸업식’이 ‘학위수여식’으로 이름을 바꾸자, 1997년 2월의 이 행사는 조 금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간에는 학생과 교직원들이 주가 되는 우리 대학 차원의 내부행사 수준에 머물 렀다면, 이해의 행사는 진주라는 소 도시를 기분 좋은 떠들썩함으로 채 운 하나의 축제가 되어 있었다. 당 사자인 졸업생과 그 가족과 친지 이 외에도 지역 주민들과 유지들이 자 리를 메우고 최초의 학위 수여를 함 께 축하했다. 당시 정종권 학장의 축사에도 그 자리의 들뜸과 흥분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데, 그 한 대목 을 여기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그해의 졸업생에게만 학위가 수여 된 게 아니었다. 1997년 이전 졸업 자에게도 변화의 혜택이 돌아가, 본 인 신청에 따라 전문학사 학위를 받 을 수 있었다. 계열에 따라 그들에 게는 간호전문학사, 보건전문학사, 공업전문학사, 관광전문학사 등의 학위가 수여되었다.
매년 임상 실습이 시작될 무렵, 우리 대학의 대강당은 나 이팅게일 선서식에 참여하기 위한 사람들로 꽉 찬다. 선 서하기 위한 간호학부 학생들과, 이들의 선서를 보기 위 해 모인 정종권 총장과 교직원, 재학생 선후배, 학부모, 내외빈들로 북적인다.
그곳에서 단연 돋보이는 이들은 하얀 간호사복을 입은 간호학부 학생들이다. 강당 중앙에 나란히 서 있는 간호 학부 학생들의 얼굴엔 사뭇 결연함마저 서려있다. 나이 팅게일 선서식이 시작되면 소란했던 대강당엔 엄숙한 기 운이 감돈다. 병원 임상실습을 앞둔 간호학부 2학년 학 생들이 참석한 이들 앞에서 의료계와 환자를 위해 책임 과 의무를 다하겠다고 선언하는 자리기 때문이다. 개회사 - 국민의례 – 나이팅게일 입장 - 촛불의식 – 나 이팅게일 선서 – 격려사- 축사 - 축가 – 교가 제창 순으 로 진행되는 우리 대학의 나이팅게일 선서식은 어느덧 50 회의 전통을 쌓아왔다. 해마다 대표 나이팅게일은 엄격한 조건을 통과한 선발식을 거쳐 그 자리에 설 수 있다.
나이팅게일 선서식은 현대 간호의 초석을 닦은 나이팅 게일을 기리며 시작된 행사다. 크림전쟁 당시 야전병원 에서 일하게 된 그녀는 엉망인 군 의료계 현실에 통감하 며 군 의료 체계의 대대적인 개선을 실행했다. 동시에 밤 낮으로 부상병들을 돌보았는데, 밤마다 등불을 들고 돌 보는 그녀의 모습에 ‘등불을 든 여인(the lady with the lamp)’이라는 별칭까지 생겼다. 학생들이 손에 든 촛불 엔 이런 그녀를 기리는 마음과 주변을 비추는 봉사와 희 생정신이 담겨 있다.
나이팅게일 선서에는 간호사로서의 윤리와 간호원칙이 담겨 있다. 동시 에 학생 신분이 아닌 어엿한 전문간 호인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도 가진 다. 학생들은 선서문을 외우며 간호 실천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고, 스 스로 간호인으로 책임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 매해 학생들은 선서를 위 해 오른쪽 손을 들고 왼쪽 손에 작 은 촛불을 든다. 그리고 한목소리, 한마음으로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 고 간호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한다.
학생들이 외치는 나이팅게일 선서 는 초기 학교를 세웠던 고(故) 정영 수 박사의 마음과도 일맥상통한다. 의료계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마음과 환자를 위한 숭고한 마음가 짐 말이다. 이런 정신은 매년 진행 되는 나이팅게일 선서식을 통해 현 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선서식 이 진행되는 한 앞으로도 계속될 것 이다.
“나는일생을의롭게살며전문간호직에최선을다할것을 하느님과 여러분 앞에 선서합니다.
나는 인간의 생명에 해로운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간호의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겠으며,
간호하면서 알게 된 개인이나 가족의 사정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나는 성심으로 보건의료인과 협조하겠으며
나의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헌신하겠습니다.”